가을바람 - 강 소천 -
아람도 안 벌은 밤을 따려고
밤나무 가지를 흔들다 못해,
바람은 마을로 내려왔지요.
싸릿가지 끝에 앉은 아기잠자릴
못 견디게 놀려 주다 그도 싫어서,
가을바람은 앞벌로 내달렸지요.
고개 숙인 벼이삭을 마구 디디고
언덕빼기 조밭으로 올라가다가,
낮잠 자는 허수아빌 만났습니다.
새 모는 아이 눈을 피해가면서
조이삭 막 까먹는 참새떼 보고,
바람은 그만그만 성이 났지요.
저놈의 허수아비, 새는 안 쫓고
어째서 낮잠만 자고 있느냐?
후여후여 팔 벌리고 새를 쫓아라.
가을바람에 허수아비는 정신 차렸다.
두 팔을 내저으며 새를 쫓는다.
새들이 무서워서 막 달아난다.
가을바람 오늘은 좋은 일 하고
마음이 기뻐서 막 돌아갑니다.
머리를 내두르며 돌아갑니다.
겨울밤 - 강 소천 -
바람이 솨아솨아솨아 부는 밤
문풍지가 부웅붕 우는 밤
겨울밤 추운 밤.
우리는 화롯가에 모여앉아
감자를 구워 먹으며 옛날 얘기를 합니다.
언니는 호랑이 이야기
누나는 공주 이야기
나는 오늘밤도 토끼 이야기.
감자를 두 번씩이나 구워 먹고 나도
우리는 잠이 안 옵니다.
겨울밤은 길고 깁니다.
우리는 콩을 볶아 먹습니다.
강냉이를 튀겨 먹습니다.
그래도 겨울밤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귀뚜라미 우는 밤 - 강 소천 -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엔
멀리 떠나간 동무가 그리워져요.
정답게 손잡고 뛰놀던 내 동무
그 곳에도 지금 귀뚜린 울고 있을까?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엔
만나고 싶은 동무께 편지나 쓸까.
즐겁게 뛰놀던 지난날 이야기
그 동무도 지금 내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운 언덕 - 강 소천 -
내 고향 가고 싶다 그리운 언덕
동무들과 함께 올라 뛰놀던 언덕.
오늘도 그 동무들 언덕에 올라
메아리 부르겠지, 나를 찾겠지.
내 고향 언제 가나 그리운 언덕
옛 동무들 보고 싶다, 뛰놀던 언덕.
오늘도 흰구름은 산을 넘는데
메아리 불러본다, 나만 혼자서.
그림자와 나 - 강 소천 -
보름밤 앞마당에
그림자와 나는 심심하다.
그림자도 우두커니 섰고
나도 우두커니 섰고.
그림자는 귀먹은 벙어린 게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
보름밤 앞마당에서
나는 그림자와 술래잡기를 하자고 했다.
그림자도 그게 좋단다.
그럼 술래를 정하자고 했다.
그림자도 술래가 되기 싫단다.
내가 술래가 되기 싫다니까
그림자가 얼른 손을 내민다.
내가 그럼 가위바위보를 하자니까
- 그림자가 주먹을 내고
- 내가 '바위'를 내고
아무도 이긴 사람은 없다.
아무도 진 사람은 없다.
그림자가 또다시 가위바위보를 하잔다.
내가 그럼 또다시 가위바위보를 하자니까
- 이번엔 그림자가 손을 펴내고
- 이번엔 내가 '보'를 내고
또 아무도 이긴 사람은 없다.
또 아무도 진 사람은 없다.
보름밤 앞마당에
그림자와 나는 답답하다.
- 장에 간 엄마는 아직 안 돌아오고
- 여기서 저기서 개들은 짖고
그림자는 겁쟁인 게다.
나두 어쩐지 무서워진다.
나무와 나 - 강 소천 -
나무들은 제 나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한 살씩 나이를 먹을 때마다
동그라미를 그려 둔대요.
나는 동그라미를 그리는 대신
일기장 하나씩을 남겨 놓지요.
그 일기장엔
날마다 지낸 그대로의 이야기가
죄다 적혀 있어요.
커서 읽어보면 부끄러울 이야기
뉘우칠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노래하는 봄 - 강 소천 -
아지랑이 아롱아롱 푸른 벌판을
꽃보라 흩날리며 오는 꽃수레
실로폰에 플롯에 온갖 새소리
비리비리 종종종 비리비리종
지지배배 꾀꼴꼴 지리지리지
나비들도 너울너울 뒤따라온다.
예쁜 꽃들 방실방실 웃는 벌판을
흥겨운 목동들의 피리소리에
나물 캐던 아가씨 노래부르네.
니나니나 삘릴리 니나니나니
오아오아 삘릴리 오아오아오
수양버들 너울너울 종일 춤추네.
눈 내리는 밤 - 강 소천 -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닭 - 강 소천 -
물 한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한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번 쳐다보고
민들레 - 강 소천 -
길가의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첫 돌맞이 울 아기도 노랑 저고리.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 보아라,
아가야 방실방실 웃어 보아라.
첫 돌맞이 울 아기도 노랑 저고리.
아가야 아장아장 걸어보아라,
민들레야 아장아장 걸어보아라.
바다로 가자 - 강 소천 -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갈매기 오라 손짓하는 바다로 가자.
푸른 물결 속에 첨벙 뛰어들어
물고기처럼 헤엄치다,
지치면 모래밭에 나와 앉아
쟁글쟁글 햇볕에 모래성을 쌓자.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한 바다로 가자.
한창 더위로 꼼짝 못하는
여름 한철은 바다에서 살자.
바람 - 강 소천 -
- 얘, 넌 오늘
어디 가 뭘 했니?
- 나? 길거리에서
바람개비 돌렸지.
- 그래, 넌 오늘
어디 가 뭘 했니?
- 난 오늘 공중에서
연 올렸지.
- 얘, 오늘 밤엔
너 뭐 할테냐?
- 난, 숲속에 들어가
소롯이 자야겠다.
- 나두 일찍이
자야겠다.
- 아아 고단하다.
- 아아 다리 아프다.
버들피리 - 강 소천 -
아버지가 밭갈이하시는 시냇가 언덕에
나는 동생과 나란히 앉아
버들피리를 불었지요.
삘릴리 삘릴리
버들피리를 불었지요.
"이랴 낄낄, 이랴 낄낄."
소 몰아 밭 가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리들이 부는 버들피리 속에 한데 어울려
곱다랗게 곱다랗게 들려 옵니다.
졸졸졸 속삭이는 시냇물 소리도,
음매애 음매
송아지 찾는 엄마 소의 목소리도,
우리가 부는 버들피리 속에 한데 어울려
정답게 정답게 들려 옵니다.
보슬비의 속삭임 - 강 소천 -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파란 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사슴뿔 - 강 소천 -
사슴아, 사슴아!
네 뿔은 언제 싹이 트니?
사슴아, 사슴아!
네 뿔은 언제 꽃이 피니?
새벽종 - 강 소천 -
아름다운 새벽종 소리가
내 귓가에 날아와 앉는다.
민들레씨가 바람에 흩날리듯
종소리는 종 속에서 마악 쏟아져 온다.
종소리는 맑은 공기를 타고 훨훨 날아
마을로 집으로 찾아 든다.
종소리는 문틈을 새어 방 안으로 들어와
앉을 자리를 찾아본다.
일찍이 잠이 깬 아이들의 귓가에만
아름다운 종소리는 날아와 앉는대요.
새하얀 밤 - 강 소천 -
눈빛도 희고
달빛도 희고
마을도 그림 같고
집도 그림 같고
눈빛도 화안하고
달빛도 화안하고
누가 이런 그림 속에
나를 그려놓았나?
아기와 나비 - 강 소천 -
아기는 술래
나비야, 날아라.
조그만 꼬까신이 아장아장
나비를 쫓아가면
나비는 훠얼훨
"요걸 못 잡아?"
아기는 숨이 차서
풀밭에 그만 주저앉는다.
"아기야,
내가 나비를 잡아 줄까?"
길섶의 민들레가
방긋 웃는다.
조그만 하늘 - 강 소천 -
들국화 필 무렵에 가득 담갔던 김치를
아카시아 필 무렵에 다 먹어 버렸다.
움 속에 묻었던 이 빈 독을
엄마와 누나가 맞들어
소나기 잘 내리는 마당 한복판에 들어내 놓았다.
아무나 알아 맞춰 보아라.
이 빈 독에 언제 누가 무엇을
가득 채워 주었겠나.
그렇단다.
이른 저녁마다 내리는 소나기가
하늘을 가득 채워 주었단다.
동그랗고 조그만 이 하늘에도
제법 고오운 구름이 잘도 떠돈단다.
종소리 - 강 소천 -
아름다운 종소리가 새벽 종소리가
날아와 앉는다 내 귓가에.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흩날리듯
종 속에서 쏟아지는 새벽 종소리
뗑 뗑 뗑 뗑.
아름다운 종소리는 새벽 종소리는
마을로 집으로 찾아 든다.
일찍이 잠이 깬 아이들의 귓가에만
날아와 앉는대요 새벽 종소리
뗑 뗑 뗑 뗑.
호박꽃 초롱 - 강 소천 -
호박꽃을 따서는 무얼 만드나?
무얼 만드나?
우리 아기 조그만 초롱 만들지,
초롱 만들지.
무엇에 쓰나?
우리 아기 초롱에 촛불 켜 주지,
촛불 켜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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