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렌트 전 원주 이야기.
너무 많은 것들이 힘들게 보이는 요즘같은 상황에서 여러분 들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연예인 세계도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다.
방송국에 연예인만 1600여명이 있고, 그 중의 대다수가 무명이다.
다 아시겠지만 무명 시절은 기약도 없고 항상 배가 고프다.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연출자들에게 얼굴도장 찍는 일이다.
그래서 일이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연출자들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려고
왔다갔다 한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 뛰고 만나서 얼굴도장 찍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키가 이렇게 작은 게 어릴 때 못 먹고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
5학년 때부터 였는데 그 때 제일 많이 한 일이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길어 나르는 일이었다.
인천에 살 때였는데 그 곳은 짠물이 많이 나서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무거운 물지게가 나를 짓눌러서 이렇게 키가 안 자란 것 같다.
밥도 짓고 등등 무지무지하게 힘든 나날이었는데,
그 때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강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계모"라고 믿었을 만큼 어머니에게 많이 혼나고 얻어맞고 자랐는데,
그 땐 울면 더 맞았고 만약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 날은 완전히 죽는 날이었다.
여러 분도 자녀를 키울 때 강하게 키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약하고, 자신의 실수 등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출세 못한다.
산에 가서 잡초를 뽑을 때도 뿌리 채 쉽게 뽑히지 않는다.
그 만큼 혹독한 환경 하에서 악착같이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실에서 자란 화초를 생각해보라.
살짝만 힘을 줘도 금방 뽑히지 않는가?
우리도 잡초처럼 살아야 하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악착스럽게 일했다. 떡도 팔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만들어서 내다 팔았다.
그러던 끝에 돈을 모아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하는 전날 밤에 짐 보따리를 전부 싼 상태에서 "원주야~" 하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허구한 날 쥐어박고 꼬집고 꾸짖고 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나를 다정하게 부르시는 것이었다.
안방으로 건너가니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따뜻하게 꼭 잡고 "큰 딸, 그 동안 고생 많이 했다.
서울 가면 너 하고 싶은 것 전부 해 줄께"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포목상을 내고 장사를 하셨는데,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을 만큼 수완이 좋았다.
손님이 오면 뭐라도 먹였다. 떡이든 쥬스든... 언젠가 내가 물어 보았다.
엄마는 어째 그렇게 장사를 잘 하우? 어머니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딴 거 없다. 손님 가슴에 거울을 대고 비쳐 보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손님이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가 어떤 일에 필요한지,
즉 손님의 가려운 곳을 알고 조금만 긁어 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뭔가를 정성으로 대접 하는 것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쥬스를 마시는 사이, 어머니는 옷감을 몇 마 "부~욱" 자르면서
"이게 제일 좋습니다~"하고 말하면,
그 손님은 "어,어-" 하면서도 웃고 그냥 그 물건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장사 수완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찬스"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찬스에 강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무엇이든 간에 대접을 하면 반드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도 성격이 맞아야 뭐라도 잘 되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목소리도 남자 같고 성격도 화끈 털털했던 반면,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소심하고 목소리도 여자 같았다.
어머니 같으면 손님이 최종 결정을 말하기 전에
이미 분위기를 주도해서 옷감을 부욱 자르고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손님이 최종 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꼼짝 않고 가위만 들고 서있는 그런 유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사가 끝난 후에 물건을 다시 정리해서 가지런히 재진열하고,
회계 정리를 하고 하는 일에는 특출하셨다.
두 분이 고스톱을 칠 때면, 어머니는 이미 이것 저것 따와서 점수가 나 버렸는데,
아버지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따와서 무릎 앞에 깔아 놓았던 오끗 짜리나, 열끗 짜리
몇 장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각을 가지런히 잡고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일의 순서도 큰 일을 먼저 해야 빨리 성공하는 것 같다.
내가 성장해서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가정부 역만 20년을 했다.
주인 마님만 강 부자, 여 운계, 사 미자 등으로 수도 없이 바뀌어도 나는 영원한 가정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대학 출신이라고 하면 목젖이 보이게 놀라고,
이렇게 작은 전 원주도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면 더 놀란다.
한 번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보고 사람 없는 차가 혼자 굴러가는 줄 알고 뒤쫓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내겐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나는 "연예계 생활의 첫 단추를 한 번 잘못 꿰어서 계속 그런 이미지만 갖고 산다"고 느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교편을 잡았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훈육선생이 그걸 보고 "너희들 똑바로 서, 어금니 꽉 깨물어" 하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여학생들도 뺨 정도는 다 때렸으니까.
그러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뺨을 때리는데,
옆에 섰던 나도 학생인 줄 알고(키가 작으니) 뺨을 가차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로 결심을 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학교를 퇴직했다.
뭘 할까 하다가 바로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공모했던 성우 모집에 응했다.
하느님은 정말로 공평하셔서, 나는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프로그램을 맡아서 방송을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꽤 인기였다.
내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방송국에 와서
내 얼굴 보고 졸도한 남자 여럿 있었다.
어쨌거나 말은 인격이라고 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은 한결같이 잘 해야 한다.
운전하는 사람이 평소에는 곱게 말하다가 다른 운전자가 끼어 들기라도 하면 바로
'험한 얘기'가 튀어나온다.
그걸 애들이 배우는 것이다.
말을 잘 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지만 자녀에게는 산 교육이 되는 것이다.
내가 TV 방송에 출연할 때 얘기를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연예인 세상은 엄청나게 치열하다.
흐지부지 목적없이 살면 절대로 좋은 길로 못 가고,
운전하다 1분 안에 세 번 차선을 바꾸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탤런트는 굳건한 의지를 가져야 산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잊어 먹지 않도록 암기 연습도 죽도록 하고,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도 떨면 대사를 까먹기 마련이라 배포까지 키워야 한다.
그래야 캐스팅이 잘 된다.
여러분 들의 계약 활동하고 똑같지 않느냐.
우리는 녹화에 3번 지각하면 쫓겨나고, 같은 장면 NG 세번 내면 다음부터는 안 써준다.
통상적으로 남자가 더 떨었던 것 같다.
밥을 씹으면서 연기하면 대사를 까먹을까 봐 씹지도 않고 얘기하다 밥알이 다 튀기도 하고...
내가 무당 역을 맡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대사 중에 가장 힘든 것이
"귀신" 이름을 7 가지 외우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연습했는데 연기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꽹가리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까먹고 말았다.
그 때부터 연출자들 사이에는 "전 원주는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진짜 무서운 것이다. 한 명이 무려 30명에게 전파를 하더라.
김 을동 씨는 잠이 많아서 지각을 하는 바람에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고.
김 성환씨는 극중 "대감" 이름 7명을 줄줄이 읊어야 했는데,
그걸 컨닝을 하려는 요령을 피우려다,
누군가가 컨닝용으로 대감들 이름을 적어 놓은 부분을 지우는 바람에,
막상 그 대목에서 너무 당황하여 "최불암 대감, 박근형 대감..." 등으로 실제 인물의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6개월간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부터 전 원주 = 가정부, 김 성환 = 도둑(운 좋으면 포졸) 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7"이라는 숫자 때문에 고생한 우리들이었다.
밑바닥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마님 역할은 비스듬히 누워서 "밥상 들이거라" 하는 말 한 가지면 끝나지만,
가정부 역은 밥상 들고 방문을 10번 이상 들락날락 거리고,
상이 바닥에 소리 안 나게 놓아야 하는 등, 노동도 그런 노동이 없다.
게다가 애까지 업은 채로 밥상을 나르는 역이 있는 날이면 정말 중노동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오면 그 장면 하나라도 보려고 TV 를 켜면 안 나올 때가 부지기수였다.
편집된 것이다.
우리들은 방송에서 편집되면 그나마 한 푼 출연료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해서 애를 다 키우면서까지도 나는 우리 어머니께 얻어맞고는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TV 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가정부에다,
그나마 1~2초면 사라진다.."등으로 어머니 부아를 돋구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랬다.
"이 년아 다 괜찮은데 어째 너 하나가 이리 속을 썩 이냐. 너만 잘 풀리면 원이 없겠다.."
그러나 나는 돈 한 푼 없었어도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했다.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김 성환씨하고 함께 방송국에 들르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저기 봐. 식모하고 도둑놈하고 또 왔네"하고...
아들놈이 국민 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아들놈이 보고 싶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학교에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에 집에 왔더니 벌써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아들 녀석이 한 말, "엄마는 뭐 하러 학교에 와 가지고 망신을 시키고 그래..."
나는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나를 보고 "식모 왔다"라고 놀렸을 게 분명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탤런트 생활을 때려치울까 밤을 새서 고민했었다.
성공한 지금에 와서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째 : 마라톤의 원칙이다.
과욕 부리지 않고, 목표를 정하고 속도 조절하면서 꾸준히 뛰는 것
둘 째 : 날씨의 원칙이다.
비바람, 폭우가 몰아치는 날이 있어도 어느 날 분명히 해는 뜬다.
희망과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말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오기를 갖고 인내하라
셋 째 : 합창의 원리이다.
사람들과 호흡을 잘 맞추는 사람이 인기가 있다.
노래방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구인가? 마이크 독점하는 사람.
남이 노래 부르는데 꼭 끼어 들어서 노래 망치는 사람. 악만 바락바락 쓰는 사람.
흥겨운 분위기에 처진 노래 부르는 사람.
넷 째 : 등산의 원리이다.
처음에 산에 오르기로 해도 출발하기가 망설여진다.
그 때 과감하게 일어나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힘도 들고 땀도 난다.
그 때 이 정도만 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정상의 맛을 영원히 못 본다.
끝까지 올라가면 모든 것이 발 아래 있는 법이다.
정상의 맛은 아무나 느끼지 못한다.
참고, 꾸준히, 목표만 바라보고 인내를 거듭할 때 기회가 오는 것이다.
사람은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연예계 생활에서 그 오랜 세월을 빛 한 번 못 보고 구박만 받고 지내다 보니
항상 우울하고 사람들과 말도 않고 혼자서 "중얼 중얼..."대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별명이 "쭝얼이" 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시장을 봐도 미아리 시장 밤 8시 정도 시장이 파장 할 때 가곤 했다.
그 때 가면 팔다 남은 야채 등을 헐값에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장 어디에선가 장사하고 번 돈을 세는 아주머니 한 명이 시장이 떠나갈 듯
유쾌한 웃음을 웃어 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간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웃고 살자' 이렇게 굳게 결심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거울을 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했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 웃지 마, 귀신 나올 것 같아."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 제꼈던 것 같다.
그랬더니 10일만에 웃음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방송국에 들른 나는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연출자들한테 약이나 올려 주자".
연출자 대기실에 연출자들이 20명 정도 모일 때를 기다려,
나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갑작스럽게 "와 하하하~~~" 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 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나오는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하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데, 어느 날 새 드라마를 방송하게 되었는데 조연 중에 한 명으로 내가 발탁되었다.
시골의 순박한 아주머니 역할이었는데, 시골 아줌마 들은 통상적으로 목소리도 크고,
웃음도 잘 웃어야 하는데, 연출자들이 혼비백산하도록 웃어 제꼈던 그 날의 내 행동이
인상깊게 남아있다가 "드라마 성격에 전원주 웃음소리가 딱 이다"라는
의견이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그 드라마가 바로 그 유명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였고, 장장 7년 6개월을 장수한
대히트 드라마였다.
거기에서 드디어 나는 떴던 것이었다.
그만큼 방송국에서의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한 것이었고 나도 죽을 힘으로 경쟁했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것을 다 책임 져 내신 분이셨는데,
막상 본인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하셨다.
수금하러 갔 다가 언쟁 중에 쓰러지셔서 중풍을 맞고 13년 8개월을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당뇨에 실명까지 와서 별세하셨다.
어머니 상을 치를 때 김 인문씨(극중 내 남편 역)가 와서 마치 사위처럼 모든 일을
다 치루어 주었다.
사람들이 우리 집안의 사위가 바뀐 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 헌신적인 도움을 받고 나는
"이것이 사람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도리"라는 것을 깊이 느꼈다.
여러분도 건강해야 하고 그러려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에는 시원한 웃음과 노래가 제격이다.
아울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돕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오랜 고생 끝에 인기인이 되었다.
CF 도 줄줄이 찍었고...
20년을 참고 뜬 태양은 지지도 않더라.
여러분도 인내하고 밀어붙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지금 난 일년치 스케줄이 새카맣다.
오늘만 해도 네 군데 일정이 있다.
강연2번, 녹화2번. 일이 많으면 피곤하지도 않고, 일이 없을 때 힘들고 피곤한 법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작아도 커 보인다.
얼굴이 이쁘도 행동이 미우면 박색이고, 얼굴이 미워도 하는 짓이 이쁘면 양귀비로 보인다.
살면서 근면하고, 절약하고, 원칙을 세우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잘해주고.. 해야 할 것이 많다
난 꿈이 또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댄스 가수들이 나를 보고 "후배"님 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내 나이 66세이지만 80세 까지는 끄떡없이 뛸 자신있다.
여러분도 오로지 내일을 향해 뛰기 바란다.
'마음에 남는 글들 > 모셔온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有我無蛙 人生之恨 (0) | 2011.12.29 |
---|---|
아버지 (0) | 2011.12.28 |
건강의 키워드 면역력 (0) | 2011.12.22 |
마음을 열고 끝없이 자신을 낮추세요. (0) | 2011.11.04 |
[스크랩] ◆★** 와인 과 양파의 놀라운 효과 *** (0) | 2011.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