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近現代 한글 詩

가을비 - 도 종환-

백산(百山) 2012. 9. 8. 19:21

 

 

 

 

가을비 - 도 종환-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피었던 꽃들이 오늘 울고 있습니다.

 

 

 

□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 도 종환 -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 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 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 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 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 혼자 사람 - 도 종환 -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대와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어요
크고 작은 일들을 바쁘게 섞어 하며
그대의 손을 잡아 보고 싶어요


여럿 속에 섞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다 슬그머니 생각을 거두며
나는 이것이 사랑임을 알아요
꽃이 피기 전 단내로 뻗어오르는 찔레순 같은
오월 아침 첫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 같은 이것이 사랑임을 알아요

 

그러나 나의 사랑이 그대에게 상처가 될까 봐
오늘도 말 안하고 달빛 아래 돌아와요
어쩌면 두고두고 한 번도 말 안하고
이렇게 살게 되지 생각하며 혼자서 돌아와요.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 종환 -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 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 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 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 떼 쉬어 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 도 종환 -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별빛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사랑은 고통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것들을

우리 손으로 허물기를 몇 번

육신을 지탱하는 일 때문에

마음과는 따로 가는 다른 많은 것들 때문에

어둠 속에서 울부짖으며 뉘우쳤던 허물들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연약한 인간이기를 몇 번

바위 위에 흔들리는 대추나무 그림자 같은

우리의 심사와 불어오는 바람 같은 깨끗한 별빛

사이에서 가난한 몸들을 끌고 가기 위해

많은 날을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건널 수 없는 강을 서로의 사이에

흐르게 하거나 가라지풀 가득한 돌 자갈밭을

그 앞에 놓아 두고 끊임없이 피흘리게 합니다.

 

풀잎 하나가 스쳐도 살을 베이고 돌 하나를

밟아도 맨 살이 갈라지는 거친 벌판을

우리 손으로 마르지 않게 적시며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깨끗이 괴로워 해본 사람은 압니다.

수없이 제 눈물로 제 살을 씻으며

맑은 아픔을 가져 보았던 사람은 압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고통까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피하지 않고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살며 사랑하는 일도 그렇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몸으로 선택한 고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