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志行上方 分福下比(지행상방 분복하비)
조선시대 청백리 중 한 사람 이였던 李 元翼 대감이
임종시 네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집 문서도 논밭 문서도 아닌 한지에 또박또박 쓴 여덟자의 글귀였답니다.
"志行上方 分福下比"
뜻과 행실은 위로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아래로 비교하라는 뜻입니다.
뜻과 행실은 너보다 나은 사람과 항상 비교해서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반면에 지위와 재물은 너보다 항상 낮은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자족하라는 뜻이랍니다.
이후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네 아들 모두 학문에만 매진 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훌륭한 목민관의 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梧里(오리) 李 元翼(이 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친 공직생활 60여년 간 40년을 정승을 지내며
6번이나 영의정에 오른 큰 인물이지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이 때문에 청렴결백을 온 몸으로 실천한 조선조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추앙받고 있다.
이 원익은 태종의 왕자인 익령군의 4세손으로 1569년(선조2)에 문과에 급제해
1634년(인조 12)죽을 때까지 65년간 관직생활을 했고,
그중 44년간 재상의 직위에 있었다.
그 동안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을 맞이해 이조판서로 평안도 순찰사를 겸임해
관서지방을 방위하는데 앞장섰고,
明나라 李 如松과 함께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원익은 40여년 간 6차의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청렴결백 해 아주 가난하게 살면서
국왕이라도 잘못을 하면 비판하고 바른 소리를 했다.
인조는 1631년(인조 9) 정월에 승지 강 홍중(姜 弘重)을 시켜
이 원익이 벼슬에서 물러나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강 홍중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두 서너 칸 초가집에 살면서 비바람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산다고 했다.
이에 인조는 “내가 한 평생 이 원익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공로와 덕행 뿐 아니다.
그의 청백한 생활을 모든 관리들이 본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곤란하게
사는 것을 근심하겠는가?”하고
임금이 오리동(梧里洞)에 집을 짖도록 했으나 그는 두 번이나 사양했다가
겨우 두어 칸 집을 지어 인조가 설득해 겨우 들어가 살았다.
베 이불과 흰 요를 내려 주었으나 이 원익은 그것도 사양했고,
뒤이어 인조는 창고를 맡은 아전에게 녹봉을 실어다 주게 했으나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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