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네, 「꽃이 하고픈 말」
새볔녘 숲에서 꺾은 제비꽃,
이른 아침 그대에게 보내 드리리.
황혼 무렵 꺾은 장미꽃도,
저녁에 그대에게 갖다 드리리.
그대는 아는가... 낮에는 진실하고,
밤에는 사랑해 달라는,
그 예쁜 꽃들이 하고픈 말을...
- 실버들 -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
한갖되인 실버들 바람에 늙고
이내 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가을 바람에 풀벌레 슬피 울때면
외로운 맘에 그대도 잠못 이루리
- 엄마야 누나야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산유화(山有花)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 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개여울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 이 개 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 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 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 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 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엣 풀이라도 태웠으면!
- 님의 노래 -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래 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잊고 말아요
- 먼 후일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 못 잊어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료
사노라면 잊을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 부모...어머니-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 보리라?
-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밟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진달래 꽃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초혼(招魂) -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음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님의 침묵(沈默)♧ - 만해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 - 만해 한 용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밝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거름이 됩니다,
그칠줄은 모르고 타는 나의 가숨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룻배와 행인♧ - 한 용운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알 수 없어요♧ - 한 용운 -
바람도 업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떠러지는 오동닙은 누구의 발자최임닛가
지리한 장마끗헤 서풍에몰녀가는 무서은검은구름의 터진틈으로
언뜻언뜻보이는 푸른하늘은 누구의얼골임닛가
꼿도업는 깁흔나무에 푸른이끼를거처서
옛탑위의 고요한하늘을 슬치는하늘은
알수없는향긔는 누구의입김임닛가
근원은 알지도못할곳에서나서 돌뿌리를울니고 가늘게흐르는
적은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노래임닛가
련꼿가튼발꿈치로 갓이업는바다를밟고
옥가튼손으로 끗업는하늘을만지면서
떠러지는날을 곱게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시임닛가
타고남은재가 다시기름이됨니다
그칠줄모르고타는 나의가슴은 누구의밤을지키는 약한등불임닛가
♧내가 사랑하는 까닭♧ - 만해 한용운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 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서시(序詩) - 윤 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별헤는 밤 - 윤 동주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얘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 었읍니다.
딴은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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