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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3대 악녀

백산(百山) 2011. 4. 27. 06:14

 

 

중국의 3대 악녀

중국의 3대 악녀는 은나라 달기, 한나라 여태후, 당나라 측천무후로 알려졌는데,

나라 역사학자들이 은나라를 역사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서태후가 추가되었지만, 지금은 은나라가 전설상의 국가가 아니라

역사상의 국가라는 사실이 밝혀 졌기 때문에 다시 태후가 빠지는 경향이 있지요.

달기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악녀 중에 하나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에

서태후는 그녀가 정말 악녀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요. 

 

달기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애첩으로 포사,서시,왕소군과 함께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미녀입니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 나오는 여성 중에 가장 악독하고 잔인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사기에는 주왕은 원래 현군이였지만 그녀를 맞이 한 후에 악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악행을 보다 못한 충신 구후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바쳤는데

그녀가 주왕의 말을 듣지 않자

달기는 그녀를 모함해서 죽이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마저 죽게 만들었지요.
그녀는 왕에게 포락지형을 건의했는데,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이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다

미끄러지면 달기는 죄인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충신 비간이 주왕에게 충언하자 주왕은 그를 잔인하게 죽였는데

그것도 달기의 생각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주왕은 달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었는데 연못을 술로 채우고

근처의 나무에 고기를 달아 놓은 후에 남녀가 알몸으로 뛰어 놀게 한

주지육림을 만든 것도 달기의 생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세계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토록 사악한 여성은 그 유례를 찾아 보기가 힘들지요.

전설에 의하면 달기가 사랑하지 않은 주왕에게 시집 온 것에 대한 복수로

은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이러한 악행을 일삼았다고도 하지만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녀는 천성적으로 사악한 성격을 가졌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사서에 의하면 달기는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망하여 주왕이 분신 자살하자

주왕의 다른 애첩과 함께 목을 매 자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와는 달리 무왕이 직접 화살을 쏘아 달기를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달기는 주왕이 죽은 후에 자결을 했고

그 후에 무왕이 시체에 화살을 쏜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달기를 처형할 때에 망나니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팔이 마비되어

그녀의 목을 치지 못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처형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서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여태후

한나라의 초대황제 고조 유방이 죽자 고조가 사랑했던 후궁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거나 죽였다고 하는데,

황제의 여자들을 이토록 혹독하게 대한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지요.

여태후는 척부인을 몹시 미워했는데 이는 척부인이 고조의 사랑을 독차지 했을 

아니라 자신의 아들 여의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장자방을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한 후에

고조는 여태후가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 여의를 해칠 수 없도록

믿을 수 있는 신하에게 그를 부탁했지만,  

여태후는 척부인을 감금한 후에 마침내 여의를 독살합니다.

이후에 척부인의 혀와 사지를 절단 한 후에 측간에 두어

그녀에게 인간돼지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들인 혜제에 척부인을 보여 주자 혜제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인생을 술에 빠져서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혜제가 술에 빠져 지내자 여태후는 자신의 반대 세력을 쫓아 내거나 죽인 후에

자신의 지지세력과 친척들을 대거 기용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친척인 번쾌 장군 등을 중용하는 반면에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해임했지요.

혜제가 죽자 이후 여러 황제를 옹립했는데, 이런 일화가 있읍니다.

여태후는 황제를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황제의 어머니를 죽였는데,

이 사실을 황제가 알자 그 황제마저 죽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러 황제를 마음대로 내세웠던 여태후는 자신의 친척들을 왕으로 옹립했고

이에 고조를 섬겼던 신하들은 여씨 세력을 숙청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여태후가 죽자 고조의 신하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여씨들은 권력을 포기하겠다고 했지만 고조의 신하들은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끝내 숙청해서 여태후의 친척들은 대부분 숙청되었지요.

당시 여씨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태후가 죽자 여씨들은 분열하여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지요.

이어서 황제에 오른 문제는 남은 여씨의 세력을 모두 숙청함으로

여씨들은 멸문을 당하고 맙니다.

 

측천무후

자신과 대립했던 친자식을 둘이나 죽였는데,

여태후가 자신을 반대했던 혜제를 죽이지 않은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악독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측천무후 역시 고종 시대 자신의 경쟁 상대였던 후궁들을 무참히 죽였는데,

자신을 궁궐에 입궁시킨 황후마저 잔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신하들하고 바람 핀 것으로도 악명 높지만 시대가 변하다 보니

지금와서 그것을 악한 행동이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측천무후는 자신과 권력을 다툰 아들을 죽인 것으로 유명한데

황후가 되기 전에는 황후를 모함하기 위하여 갓태어난 자신의 딸을 죽여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식조차 희생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악인은 많지만 반항할 힘조차 없는 갓 태어난 자식을 희생시키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지요.

 

반면에 여태후는 아들인 혜제의 권력을 빼았지 않았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여태후는 벽양후 심이기를 총애했는데(아마도 불륜관계인듯)

혜제가 노하여 벽양후를 죽이려 하자 부끄러워 하여 

벽양후를 변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록 당시에도 권력을 휘둘렀지만

혜제가 여태후가 총애하는 신하를 옥에 가둔 것으로 보아서

혜제가 허수아비 황제는 아니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측천무후는 자식을 죽인 어머니이니 여태후보다 훨씬 더 악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여태후는 비록 자신의 정적들은 무참히 죽였지만 반대로 자신이나

고조에게 충성을 바쳤던 신하들은 우대하였는데,

고조의 충신들을 숙청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훗날 여씨들이 멸문 당했으니

여태후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잘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여태후의 특이한 점은 고조의 후궁들 중 고조의 사랑을 받지 못한 후궁들을

우대했다는 점인데, 그들을 불쌍히 여겼을 뿐 아니라 우대했으며 그들을 만나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기록은 고조의 자식을 낳은 궁안의 여성들은

대부분 홀대를 받았지만, 문제의 어머니인 박태후는 자식을 낳은 후에 버림받아서

그녀를 우대했다고 합니다.

여태후가 고조에게 버림받은 여성들을 우대한 사실은

여태후의 다른 일면을 볼 수 있지요.

 

3대 악녀라는 말이 언제 생겼고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권력을 위해서 혹은 권력을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달기가 악녀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여태후나 측천무후의 경우 일부 역사학자들의 긍정적은 평가도 있다고 합니다.

여태후는 유방이 죽은 후에 흉노의 선우가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흉노와의 화친 정책을 유지하는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했는데,

여태후의 측근인 번쾌가 흉노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흉노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계포 장군의 의견을 받아들였지요.

측근들을 중용하면서도 현명한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했던

그녀의 정치 능력은 나름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요.

측천 무후 역시 신라나 발해 등 우리 나라와 무리한 전쟁을 피한 외교 정책은

무리한 전쟁으로 나라를 망친 수나라 양제와는 대조적이라는 평가가 있지요.

그리고 측천 무후의 정치적인 수완도 대단히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비록 권력을 위해서 갓태어난 딸과 자신과 대립했던 아들을 죽인 그녀였지만

무차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인 폭군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지요.

어떤 면에서 여태후나 측천 무후가 3대 악녀라는 오명을 쓴 것은

세상에 알려진 악녀가 많지 않기 때문이 아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