鷺梁津(노량진) 死六臣 묘소를 다녀 왔습니다.
세조가 癸酉靖難(1453년)으로 안평대군 과 김 종서, 황보 인 등을
제거하고 단종으로 부터 왕위를 簒奪하자
金 文起(당시 삼군 도진무 겸 공조판서로 병력동원을 맡음)를
영도자로 하여 兪 應孚, 李 塏, 朴 彭年, 柳 誠源, 成 三問, 河 緯地등이 端宗復位(1456년)를 모의하다가
김 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후일 남 효온(당시 3세)이 쓴 추강집에 언급되면서
김 문기 선생은 빠지고,
유 응부 장군을 김 문기 선생으로 오판한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이조실록에는 분명하게 김 문기 선생으로 기록되어 있어
1977년 문화재 편찬위원 만장일치로 육신에 김 문기 선생이
올랐지만 기존의 유 응부 장군도 단종복위에 가담하였으므로
오늘날 四七臣으로 부르게 되었다.
기존의 사육신은 숙종 17년(1691년)에 신원(伸冤)되어
복관되었으나 김 문기 선생은 그 보다 40년 늦은
영조 7년(1731년)에 신원 복관되어 영의정에 추서되고
지례 섬계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忠毅公 이다.
선생의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백촌(白村)이며
조부는 호조판서를 지낸 순(順)이고,
부친은 증 영의정 관(觀)이다.
신도비각
불이문
의절사
의절사 안 사육신(사칠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사육신의 영도자이신 파조 김 문기 할아버님 가묘
유 응부 장군 묘소
이 개 선생 묘소
문기 할아버님과 내외종간 이셨던 박 팽년 선생 묘소
유 성원 선생 묘소
성 삼문 선생 묘소
하 위지 선생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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