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는 글들/Issue 時事

거머리 와 모내기

백산(百山) 2012. 5. 17. 22:23

 

거머리 와 모내기

어릴 적에 거머리와 싸우며 모내기하였던 희미한 기억을 회상하여 봅니다.

우리들 고향과 주위의 부락도 마찬가지 였지만 산골이었고,

논떼기 보다는 밭떼기가 많았으며 논밭을 합쳐 보아야,

대부분 1~2천평 내외였으며, 논은 그나마

수리답(水利畓)이 아닌 천수답(天水畓)이었지요.

경작할 땅이 적었으므로 자연히 마른 논에는 가을에 보리를 심어

봄에 수확을 한 다음에 봄에 벼를 심는 二毛作을 하였답니다.

("경상도 보리 문둥이"라는 말의 어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선시대 農工行商(농공행상)의 영향인지

農者之天下大本也라 하여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대대로 살아온 고장이지요.

 

 

풍족하지 않은 살림으로 생활자금, 학자금, 영농자금을

논밭에서 나오는 곡식을 팔아서 현금을 마련하였으므로

늘 이시기에는 식량이 부족하였지요.

각 가정에 베이비 붐 세대에 해당하는 형제 자매들이,

보통 5명에서 많게는 10명이 있어서

만약 장남이 도회지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다니는 집의 동생들은

교육의 기회는 고사하고 끼니를 배부르게 먹지를 못하였지요.

아주 산골짝 동네에서 태어난 분들은 

"시집 갈 때까지 쌀 세말 못 먹고 간다"고 하였고

"겉보리 서말 만 있으면 처가살이 않한다"는 말이 있듯이

보리도 귀한 시절이라 쑥으로 털털이를 하거나 개떡을 만들어 먹었답니다.

즉 봄부터 햇보리가 나오는 芒種(망종)전후 까지를 보리고개라 하였지요.

지금은 다이어트 식품으로 호응을 받는다고 합디다 만은...하하하~!!!

 

산업화와 문명의 혜택이 늦은 탓에 이 보리고개가 우리 고장에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계속 된 것으로 기억을 한 답니다.

그 전에는 낮에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거나 멍석을 만들고,

밤이면 동네 사랑방에 모여서 화투놀이를 하셨지요.

서론이 길었나요???

마른 논이 아닌 물 논(질어서 이모작을 못하는 논)에는 거머리가 많아서

모내기 철이 되면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았답니다.

물리지 않으려고 발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거나 동동 굴러야 하는데

그래도 어느새 달라 붙어서 피를 빨아 먹으니...

이후 국내서 나일론 스타킹이 생산되면서 거머리에게서 해방이 되었지요.

지금은 농약으로 뿌리는 살충제와 제초제 때문에 거머리도 없거니와

트렉터 나 이앙기라는 기계로 모내기를 합니다 만은...

년중 보리를 베고 벼 모내기를 하는 이 시기가

옛날에는 제일 바쁜 농번기 이었기에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농사일을 거들지 않을 수없는 시절이었답니다.

물론 두레나 놉, 품앗이 라는 것이 있었지만 강아지도 제 몫을 해야 되었지요.

현재는 비닐하우스에 특용작물 재배로 일년내내 바쁘게 생활을 하지만...

 

전직 김 영삼 대통령님께서 대선공약으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쌀시장 개방은 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우루과이 라운드 발효에 따라서 수입 쌀이 유통되면서 쌀값은 하락되었고

젊은 농민들은 시골을 떠나고 남은 분들도 대체 작물로 눈길을 돌렸지요.

마침 지금이 모내기 철이라 고향생각을 하면서 추억을 더듬어 보세요.

새참으로 먹던 쑥 개떡이 생각나 두서없이 적어 보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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