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慶州 崔富者 댁과 高軒 朴 尙鎭 義士.
경주 半月城 서편 校洞(교동) 69번지에 위치하며 閼智(알지)가 태어난
鷄林(계림)이 있고 동편에 鷄林鄕校가 있으며 마을 앞으로 蚊川(문천)이 흐르고
月精橋(월정교)가 놓여 있으며 신라시대 瑤石宮(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여 진다.
元曉大師(원효대사)와 사랑을 나눈 신라 瑤石(요석)공주가
아들 대학자 薛聰(설총)을 낳은 궁터에 있던 최 부잣집 사랑채는
1970년 불에 타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상태다.
경주 최씨 종가댁 과 소 종가의 고풍스런 기와집이 있으며,
종가댁은 사랑채, 안채, 대문채(문간채)이루어져 있다.
초기에 동편에 있는 향교로 인하여 99칸에서 10칸을 뺀 89칸 규모로 지었고
2천평의 부지에 1만평의 후원이 있었으며 노비가 100여명 이었다고 한다.
校村 또한 풍수적인 명당으로 온달(보름달)이면 기울게 되지만,
반달형의 터이라 보름달을 향해 가기 때문에 더없이 좋은 형국이고
富를 쌓는 터라고 합니다.
臨水(임수)로 집 앞에 蚊川이 흐르고 있지만
背山(배산)이 없어서 집 뒤에 裨補林으로 소나무와 괴목을 심었다.
12대 300년간 대대로 부를 일구었고 아름다운 기부로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경주 최부자의 1대 貞武公 崔 震立(1568~1636)장군은
始祖인 최 치원 선생의 17世孫이고 中始祖인 최 예 선생이 7世孫 이고
佳巖波의 波祖이다.(佳巖村 世居地 : 內南面 伊助里)
임진왜란 때 25세의 나이로 동생 崔 繼宗(계종)과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권 율 장군을 도와 울산 서생포 전투에 큰 공을 세웠으며
69세 노령에 병자호란 용인 전투에 전사했으며 청백리로 기록 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며 정무공의 시호를 받고 충렬사에 모셔졌다.
경주 최부자의 종택인 내남면 이조리는 정무공 최 진립 장군의 부친인
臣輔(신보)공의 처가 마을이고 풍수에서 양택지로는 최고의 자리라 합니다.
이후 최부자 댁은 최 진립의 공신 토지를 기반으로 그의 三男 崔 東亮(동량)이
터전을 만들고 孫子인 최 國璿(국선), 국선의 二男 최 義基(의기)가
부자의 기틀을 세웠고 200년을 내남면 이조리 게무덤 이라는 곳에서
5대를 내려오며 살았다.
내남면 이조리 게무덤에 살던 최 부자 집 일족 가운데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지금의 자리인 경주 교동의 鄕校와
司馬所 사이로 옮겨 와 7대를 만석꾼으로 살았다.
1대 최 진립(1568~1636) 무과급제, 공조참판, 증 병조판서
2대 최 동량(1598~1664) 용궁현감
3대 최 국선(1631~1682) 사웅원 참봉
4대 최 의기(1653~1722)
5대 최 승렬(1690~1757) 통덕량
6대 최 종율(1724~1773) 성균관 생원시
7대 최 언경(1743~1804)
8대 최 기영(1768~1834) 진사시(龍庵)
9대 최 세린(1791~1846) 생원시(大愚)
최 세구(방계) 생원시
10대 최 만희(1832~1879) 진사시
최 만수(방계) 진사시
최 만선(방계) 진사시
11대 최 현식(1854~1928) 진사시(鈍次)
최 현교(방계) 진사시
12대 최 준(1884~1970) 참봉
13대 최 염(현 서울거주)
14대 최 성길(사법고시 합격)
최 판사가 대대로 이어 온 진사 이상의 벼슬을 말라는 가훈을 어기는 결과(?)가 되었다.
경주 교동 집은 현재 영남대학 재단 소유이고 최 부자 후손은
그 집에서 거주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한말의 거유(巨儒)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최익현(崔益鉉),
일제 강점기 겨레의 스승이며 독립운동가인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 등
많은 학자, 명신, 지도자를 배출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이자,
삼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영남의 명문거족이다.
"10대 진사, 12대 만석, 400년 보시(報施)"의
“경주 최부자”댁은 28世孫 최준(崔浚)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은 사회사업과,
일제 시대엔 독립운동에 큰 자금을 내는 등 한국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 특권 계층의 사회적 책임)로 꼽힌다.
최 부자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최 부자 집의 재산은 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으로 많이 쓰이고,
나머지는 광복 후 교육 사업에 들어가 지금은 집도 후손들 소유가 아니다.
만석 재산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은 이 시대에 이어 갈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다.
富不三代(부불삼대) "부자 3대를 못 간다." 는 말과
權不十年(권불십년) "권세(權勢)는 10년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경주 최 부자 집의 만석꾼 전통은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가졌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인생의 師表로서 경주 최 부자 집의 명성을 드높인 분이
바로 최 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汶坡 崔 浚(1884~1970)선생이다.
직접 투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구한말에는 신 돌석 장군이 이 집으로 피신하였고,
74세의 노령에 의병을 일으키신 최 익현 선생이
여러 날을 머물러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사랑채에서 엿새동안 머물면서
최 준(崔 浚 1884~1970)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호남의 제일가는 갑부로 당시 10만석을 하는 인촌 김 성수 집안과도 잦은
교류가 있었다. 인촌은 고려대를 세웠고 인촌의 영향으로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 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백산상회는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과 군자금을 계속 보내게 되니 결국
부도를 맞게 되었고 사장인 문파 최 준이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殖産銀行)과 경상합동은행에게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최 준 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제의 內鮮一體(내선일체) 정책으로 최 부자집의 재산을 몰수 할 경우
조선팔도에 일본에 대한 반감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는 한다.
그리하여 최 준은 재산의 절반을 건질 수 있었다.
해방 후 최 준(당시 62세)은 김 구(당시 70세) 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안 희제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해방이 된 뒤 나라의 발전을 위한 인재양성이 시급하고 중차대한 일임을
인식하고 육영사업에 남은 전 재산을 몽땅 희사하여 지금의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 설립에 전 재산을 내어 놓았다. 그러한 이유로
경주 최 부자집 하면 최 준 선생을 떠 올리게 되는 이유이다.
최 준은 대구대학(영남대학)은 5.16후 운영이 어려워 삼성 이 병철씨에게
학교를 대가없이 넘겼으나 한비사건(사카린 밀수사건)이 일어 나면서
박 정희 대통령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1990년에 최 준 과 동생 최 완은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로 후손은 독립유공자로 대우를 받고 있다.
대한 광복회 총사령관을 지내시다 옥고로 순직하신
高軒 朴 尙鎭 의사와 汶坡 崔 浚 선생의 관계는 四寸 妹夫(매부)와 妻男이었고
친구 사이였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朴尙鎭(1884.12.7~1921.8.13)의사는 독립 운동가이며 아호는 고헌(固軒)이다.
경상남도 울산의 최고 갑부였으며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남 지역의 명망 있는 유학자로 의병 운동을 일어 켰다가
사형 당한 의병장 허 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면서 신학문도 익혔다.
그는 졸업 후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일제치하에서의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만주 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다.
만주에는 허위의 형인 허 겸을 비롯하여 이상룡과 김동삼, 손일민, 김대락 등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인물들이었다.
중국에서 활동 당시에 孫 文에게 대한독립의 전략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손 문이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애석해 하면서 광복군의 지도자로 큰 일을 이루어 달라고 하고
자신의 권총을 내어 주었다고 한다.
귀국한 뒤에는 당시 영남의 만석꾼이었던 가문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 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 상진은 이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
김 좌진 장군과는 의형제를 맺었다.
대한광복회의 강령은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 받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독립의연금에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직상 과 장택상의 아버지)을 살해하고 도고면장 박용하, 양재학, 보성부호 서도현 등을
처단하는 대한광복회의 여러 테러 활동을 주도한 혐의를 받으며 불철주야
독립운동에 여념이 없었던 박 의사에게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기별이 왔다.
일제가 독립운동의 핵심인 의사의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동지들이 장례에 불참하도록 적극 만류를 하였으나 독립운동으로 나라에
충성을 하면서 자식의 도리인 효를 다하지 않을 수 없다며
모친의 빈소를 찾았다가 일경 들에게 체포 되었다.
험악한 체포의 순간에도 박 의사는 자신의 백마를 타고 의연하게 앞장을 섰으며
박 의사의 체포 소식을 들은 김 좌진 장군이 결사대를 조직하고 대구 형무소를
습격하여 구출하려 했으나 동지들의 피해를 우려한 의사께서 만류하였다.
1918년 체포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부인께서 직접 지으신 수의를 입고
37세의 젊은 피를 조국 광복의 제단에 바치시고 돌아 가셨다.
박 의사님의 시신을 울산시 북구 송정동의 생가에 모시지 않고
경주 내남면 노곡리에 묘소를 쓴 이유는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을 당하신 후
철도를 이용해 시신을 경주까지 모셔 와 경주 최 부자 최 준의 집에 일단 안치를 하였다.
일제는 최 준에게 장지를 내어 주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고
경주 외동면 녹동리 와 울산의 송정동 자택은 가세가 기울어 장례를 치를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푹푹찌는 8월의 염천 날씨에 장례를 치루지 못하게 되자
최 부인이 동생 최 준에게 울면서 호소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 준은 집안이 망하는 것을 각오하고 십여일 후 교동 경주 최씨의 선산으로
최 진립 장군이 묻힌 선산을 내어 줌으로써
죽어서도 갈 곳이 없었던 妹兄인 高軒 朴 尙鎭 義士를 영면하시게 했다.
박 상진 의사의 부인(최 준의 사촌누님)은 해방조국에서 돌보는 자가 없어
홀로 냉방에서 끼니를 굶다가 돌아가셨으며, 박 상진 의사의 지시에 의하여
처단된 악질적 친일 칠곡 부호 장 승원의 아들인 장 택상
(향후 외무대신 및 총리까지 지냄,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음)등의
말살 작업등으로 인하여 박 상진 의사의 업적조차 철저히 가려지고 왜곡되었다.
청산리 전투의 김 좌진 장군님이 대한 광복회 부사령관이었지만 광복 후
1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박 상진 의사님은 5.16후 1963년 3급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지만
유족들에 의해 형평성 논란을 받았다.
청산리 대첩(1920년)에서 김 좌진 과 홍 범도 장군이 승리 할 수 있었던 것도
박 상진 의사가 모금한 군자금 6만원(당시의 1원은 현재 30만원 정도)으로
구입 한 무기가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의사 사후 그의 후손 일곱 집안 백 여명은 전국각지로 거지처럼 흩어졌고
가훈으로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쌓지 말라는 유훈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대학교를 나와 너무 똑똑하여 독립운동에 만석꾼 전 재산을 바치고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기에 후손은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는 슬픈 사연입니다.
□ 자료에 의한 박 상진 의사 연보
1884년 울산 송정동에서 사간원 정언, 홍문관 시독, 장례원 장례, 승정원 승지,
규장각 제학과 부제학을 지낸 박 시규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00만에
백부 홍문관 교리 박 시룡(외동리)에 출계하다.
1898년 경주 최부자 댁의 월성 최씨 永伯(영백)과 결혼
1899년 의병장을 지낸 허 휘 문하에 입문
1905년 스승 허 위의 영향을 받아 양정의숙 입학
1908년 양정의숙 졸업 및 판사시험에 합격(1910년)하여 평양재판소 로 발령
1911년 벼슬길을 버리고 의주와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대한광복회 결성. 총사령에 추대
군자금 마련활동 및 반민족 친일부호 처단활동.
1917년 '총포화약류 단속령' 위반으로 한 차례 투옥
1918년 대한광복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1921년 8월 형집행으로 순국.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박 의사 絶命詩(사형집행 전 만세삼창 후 지은 詩)
難復生此世上(난부생차세상) 두번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幸得爲男子身(행득위남자신) 다행히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는 행운을 얻었건만
無一事成功去(무일사성공거) 이룩한 일(조국광복) 하나도 없이 저승길 나서려니
靑山嘲綠水嚬(청산조녹수빈) 청산은 날 조롱하고 녹수조차 비웃도다.
□
鴨江秋日送君行(압강추일송군행) 가을 깃든 압록강 넘어 그대를 보내매
快許丹心誓約明(쾌허단심서약명) 쾌히 내린 그대 단심이 우리들 서약 밝게 해주네
匣裏龍泉光射斗(갑리용천광사두) 칼집 속의 용천검이 홀연히 빛 발할지니
立功指日凱歌聲(입공지일개가성) 이른 시일 내 공 세워 개선가 불러보세
만주로 떠나는 광복회 부사령이었던 백야 김 좌진 장군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거금 6만원(현재 180억원)을 건네주며 읊은 시.
이 군자금으로 체코 제 무기를 구입하여 "청산리 대첩"이 이루어 졌다.
타인에게 넘어간 박 의사의 생가는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사업을 하였다.
특히 박 의사가 처단한 칠곡 출신의 친일 부호이자 경상도 관찰사였던
장승원은 충추원 참의를 지냈던 장직상 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부친으로 이들에 의해 박 상진 의사의 기념사업이나 추모비 건립이 방해를 받았다.
자신의 안락과 영화로운 삶을 마다하고 一片丹心으로 독립운동의 횃불을 밝히고
나라에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는 忠孝同根(충효동근)으로
하나의 근본(一本)임을 가르쳐 준 위대하신 인물 이셨습니다.
문파 최 준 선생과 박 상진 의사님은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지식인은 많았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렵고 힘든 일을 너무도 쉽게 보여 주셨습니다.
崔 浚은 광복 후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1950년,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大와 청구大를 세우며 만석군의 전통은 맥이 끊어졌으며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물은 糞尿(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첫째는 장자우선의 유교사상으로 형제간의 균등한 재산분배가 이루어 지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修身齊家(수신제가)의 家居六訓 과 六然의 遺訓을 후손들이 철저히 지키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덕행을 쌓고 부자로서의 道를 실천했으며
인간의 본질인 욕망을 절제한 결과 많은 民亂(민란)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아래는 현대적인 경영과 관리의 관점에서 정리한 요점입니다.
1. 부를 유지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지위만 갖는다.
2. 한국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노사관계를 실천한다.
3.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간다.
4.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간관리자를 세운다.
5. 양입위출(양입위출)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한다.
6.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지 않고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7. 때를 가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린다.
8. 지나치게 재산을 불리지 않는다.
9. 청백리 바탕에 둔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한다.
10. 이루기 힘든 일일수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다.
11.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게하고 항상 후하게 대접한다.
12. 자신을 낮춰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한다.
13.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14. 2등을 위해 1등 만큼 노력한다.
15.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집안을 다스리는 齊家(제가)의 가훈 十訓(십훈) 과
자신의 몸을 닦는 修身(수신)의 가훈 六然(육연)이 현재까지 후손에 전하여 진다.
사랑채에는 8대 만석꾼의 아호인 龍庵古宅이라는 현판이 있고,
大愚軒(대우헌)의 大愚란 마지막 최 부자인 汶坡(문파) 최 浚 선생의 증조부로
9대 만석꾼 최 세린 공의 아호였다. 즉 "크게 어리석어라."
어리석음을 스스로 자처하여 상대방의 경계심을 없애라는 뜻이 담겨 있고
鈍次(둔차)는 선친으로 11대 만석꾼 최 현식 공의 아호였다고 한다.
뜻은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간다는 뜻으로 中庸之道(중용지도)의
실천을 강조 한 것이다.
□ 慶州 崔富者 家門의 家訓(家居十訓)
1. 인륜을 밝힌다.(明人倫)
2.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한다.(事親孝)
3. 임금을 사랑함에 충성을 다한다.(愛君忠)
4. 가정을 잘 다스린다.(宜室家)
5.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다.(友兄弟)
6.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다.(信朋友)
7. 여색을 멀리한다.(遠女色)
8. 술에 취함을 경계한다.(戒醉酒)
9. 농어과 잠업에 힘쓴다.(課農桑)
10. 경학을 익힌다.(講經學)
□ 慶州 崔富者 家門의 六訓.(집안을 다스리는 교훈)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 慶州 崔富者 家門의 六然.(자신을 지키는 교훈)
1. 自處超然(자처초연) 스스로 초연하게 행동하라.
2. 對人靄然(대인애연) 남을 대할 때 온화하게 대하라.
3. 無事澄然(무사징연) 일이 없을 때 맑게 지내라.
4. 有事敢然(유사감연) 일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대처하라.
5. 得意淡然(득의담연) 뜻을 이룬 뒤 담담하게 처신하라.
6. 失意泰然(실의태연) 뜻을 잃었어도 태연하게 처신하라.
경주 교동 최부자 고택
솟을 대문
큰 사랑채 와 정원
큰 사랑채에 용암고택(8대), 대우헌(9대), 둔차(11대) 편액이 걸려 있다.
정원수로 심어 놓은 산수유 나무에
빨갛게 익은 아직도 열매가 아직도 달여 있다.
행랑채
800석을 보관했다는 곳간
안채와 장독대
박 상진 의사 생가 복원 전/후 사진
현재 송정 2지구 택지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서
주위에 집들이 철거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