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는 글들/모셔온 글

四不三拒

백산(百山) 2013. 1. 20. 10:12

 

 

 

四不三拒

조선시대에는 유학 정신과 함께 선비 정신의 주요 덕목으로

청렴(淸廉), 결백(潔白), 안빈(安貧) 등이 있었으며,

청렴을 실천하는 일종의 행동수칙으로 四不三拒라는 금기사항까지 있었다.

사불삼거(四不三拒)는 소위 네 가지를 하지 말고 세 가지를 거절하라'는 말이다.

 

四不 부업을 하지 않고,

       땅을 사지 않으며,

       집을 늘리지 않고,

       재임 중인 고을의 명물을 먹지 않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三拒는 윗 사람이나 세도가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청을 들어준 다음 답례를 거절해야 하고,

       재임 중 경조사에 부조를 일체 받지 않는 것을 이른다.

 

一不은 부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조 때 호조(戶曹)의 서리로 있던 김수팽(金壽彭)이 어느 날

혜청(惠廳)의 서리로 있는 동생집에 들렀다가 마당에 널려 있는 항아리에서

염색하는 즙이 넘쳐 흐르는 것을 보고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그래서 동생이 처가 염색으로 생계를 돕고 있다고 하자,

노하여 동생을 꾸짖으며

 "우리 형제가 더불어 국록을 먹고 있으면서 이런 영업을 하면

 저 가난한 백성들은 무엇으로 생업을 삼으란 말이냐" 하고

 모조리 그 염색 물을 쏟아 버렸던 것이다

 

二不은 재임 중 땅을 사지 않는 것이다.

윤석보(尹碩輔)가 풍기군수로 있을 때 고향에 두고 온 그의 처 박씨가

굶주리다 못해 시집올 때 입고 온 비단옷을 팔아 채소밭 한 뙈기를 샀다.

윤석보는 이 소식을 듣자 조정에 사표를 내고 고향에 가서 땅을 물리고서

대명(待命)을 하였다.

 

三不은 집을 늘리지 않는 것이다.

대제학 벼슬의 김유는 서울 죽동에 집이 있었는데,

어찌나 좁은지 여러 아들들이 처마 밑에 자리를 펴고 거처할 정도였다.

그가 평안감사로 나가 있는 동안 장마 비에 처마가 무너지자 이를 수리하면서

아버지 몰래 처마를 더 달아냈다.

후에 돌아온 아버지는 처마가 넓어진 것을 알고 당장 잘라내었다.

  

四不은 재임 중 그 고을의 명물(名物)을 절대 먹지 않는다는 것다.

조오(趙悟)가 합천 군수로 있을 때 고을 명물인 은어를 입에 대질 않았고,

기건(奇虔)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그 곳 명물인 전복 한 점을 먹지 않았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공직자의 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一拒는 윗 사람이나 세도가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다.

조선 중종 때 한 청송사또가 당시 영의정이 청송의 꿀과 잣을 보내 달라고 하자

 "잣나무는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사또 된 자가

  어찌 얻을 수 있나"라는 답신을 통해 영의정의 사과를 받았다는 것이다.

 

二拒는 사육신 박팽년이 관직을 천거한 보답으로 친구가 땅을 주려고 하자

친구에게 관직을 내 놓던지 땅을 찾아 가라고 한 것처럼 청을 들어 준 다음

답례를 거절하는 것이다.

 

三拒는 재임 중 경조애사의 부조를 받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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