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여행>
왕희지(王羲之) 321~379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그는 한(漢)나라 때 시작 된 해서(楷)·행서(行)·초서(草)의 실용적인 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킨 인물이다.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희지는 우리나이로 59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고문서에 실려있는데. 아주 오래전 일이고 문서마다 활동 연대가 조금씩 달라 정확하진 않은 것 같다. 특히 서예가들에게서는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 받는 인물이 왕희지(王羲之)이다.
(소흥의 난정못)
군자(君子)의 첫걸음이 바로 서예에서 시작하여 서예에서 그 끝은 맺는다고 옛 선비들은 말했다. 난정서(蘭亭序)모본 십칠첩(十七帖)과 집왕성교서(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며, 계제사(契祭祀)가 열리는 기간에
(난정서 일부분, 당(唐) 풍승소 모본을 다시 신룡본이 모본한 것으로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품)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明代)(1368~1644)에는 그림의 주제로도 많이 채택 되 곤 했었다.
오늘은 난정서(蘭亭序)를 중심으로만 이야기를 싣고자 하며.
(몇 년 전 절강성 소흥에 갔을때 산 부채로 난정서문이 써있다. 원본은 현재 북경 고궁박물원에 전시중이라는데. 당나라 때 쓴 모본을 다시 신룡본이 모본한 것이다. 현존하는 왕희지의 모본 중 가장 오래된 모본으로 이 모본마저도 가격을 매길 수 없다고 한다.)
난정서(蘭亭序)! 이러한 연회는 배타적인 동진(東晉)시대 귀족문화의 특성상 사족(士族)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음으로 이날의 모임은, 술잔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동안 시(詩)를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로 술 서(3)말을 마시는 이날 지은 시(詩)를 모아 철(綴)을 하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예)
(난정서. 모본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도서(낙관)들이 찍혀 존귀함을 느끼게 한다. )
그 중 난정서의 행방에 관하여 비교적 정통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후손이 없는 지영스님은 난정서를 제자인 변재(辨才)승에게 중요성과 함께 일러주고는 입적했다. 어느날 관리 진적으로부터 강남 회계땅에 승려로 사는 변재화상 수중에 난정서 진본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상서 방현령이 결국 아이디어를 냈고, 감찰어사 소익을 변재에게 은밀히 보내 난정서를 훔쳐오게 한다.
(원나라 때 조맹부가 쓴 모본)
소익은 황제로부터 왕희지의 서첩 진본 몇 개를 싸들고 가난한 서생처럼 꾸며 그가 머무는 회계산 영흔사로 가. 변재는 난정서를 결국 소익에게 도둑 맞은 것을 알고는 크게 화가 일어 병이 돼 몸져 누었고,
위 내용이 당 태종이 야비한 계교를 써서 난정서를 얻은 내용으로
(당대(唐代) 신룡본 모본)
태종은 손에 넣은 왕희지의 난정서를 평생 곁에 두고 애지중지 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는 돈으로는 도저히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하여, 임본(臨本)및 필사본들의 글자가 조금씩 서로 제 각각인지라
(난정원)
지금도 북경 고궁박물원에는 몇 종의 난정서 필사본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 원나라 때 조맹부가 쓴 모본. 그 외에도 개인이 소장한 수 많은 모본들이 진본을 가장한 체 대를이어 내려오는것 또한 많을 것이라 믿는다.
난정(蘭亭)
- 주(註) - 왕희지(王羲之)가 태어나고 활동한 "동진(東晉)"이란 나라와 "소흥(紹興)"이란 도시에 대하여 내 나름의 주석(註釋)을 달고자 한다. 아울러 절강성 소흥 즉 샤오싱을 대표하는 이름 난 몇가지를 덧대 소개하여 추후 방문하는 자가 혹여 있다면,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이 글을 쓰는 바이다. 따라서 중국을 대표하는 소흥의 명주(名酒)인 "황주(黃酒)"와 "회계산"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샤오싱이 고향인 소설가 "노신(魯迅)"까지 소흥을 중심으로한 짤막한 부연 설명을 달았다. 이미 아는 분들도 있고, 또 처음 접하는 분들도 분명 있으리라 믿어, 난해한 난정서 서문의 이해를 돕고자, 몇 가지 단어와 함께 미천한 소견을 달았으니 부족한 점 널리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먼저 동진(東晉)은: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서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그의 손자 즉 조상(曹爽)대에 와서, 그 사마 의 아들 사마 염이 위나라에 세운 나라가 "서진(西晉)"이고, 서진이 부패로 망할 무렵 강남으로 도망 간 일족 중에 사마 예가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에 진나라을 또 세웠다. 최초 왕조 진(晉)나라를 "서진(西晉)"이라 칭 하고,
난정(蘭亭) 유명한 고사 와신상담, 오월동주, 토사구팽이 탄생한 오 월국 전쟁지역으로 월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샤오싱(紹興)은 항저우(抗州) 남쪽에 있는 역사성 깊은 중급의 수향도시(水鄕都市)이다. 강남지역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 소흥도 운하가 매우 발달한 물의 도시로 옛부터 유명한 명주(名酒)인 "황주(黃酒)" 즉 샤오싱酒의 고향이다. 술 색깔이 검게 보이나 사실은 진노랑색이다. 색이 짙어 검은색으로 보일 뿐 손가락으로 찍어 보면 진노랑색이 선명하다.
(소흥은 지금도 수로가 도로역활을 하는곳이 많다. 따라서 작은 나룻배로 오고 가는 풍경을 보는 건 흔한 일상이다.)
난정(蘭亭)의 유래: 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난을 심고 기르면서 풍류를 즐긴 정자였다고 전해온다. 소흥은 중국 춘난(春蘭)의 고향으로도 불린다. 옛부터 이름 난 춘난들이 소흥에서 많이 나왔다. 중국춘란(中國春蘭)중 4대천왕(四大天王)이라 일컬어 송매, 노십원, 만자, 용자,를 꼽는다. 그 중 절반이 절강성 소흥이 원산지로 중국춘란 산지하면 절강성 소흥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한국 춘난 명산지로 영광 함평 장성을 꼽듯이, 이름 난 수 십 종의 중국 춘난 중 1/3 가량이 소흥이 원산지이다.
(왕희지(王羲之)일가 특히 막내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일화가 깃든 태비(太碑)라고 불리는 난정(蘭亭)의 유명한 비석)
태비석(太碑石): 태(太)"字만 크게 달랑 써 있는 이 비석의 글씨는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의 합작품. 왕희지의 막내아들 왕헌지가 어린시절 큰대(大)자를 써가지고 아버지에게 자랑을 하러 가지고 갔더니, 아버지는 말도 없이 글자 밑에 점 하나만 달랑 찍어주곤 돌려보냈다. 이 글을 다시 어머니에게 가지고 가서 자신이 쓴 태(太)자라고 자랑을 하며 보여주자, 어머니 왈(曰)"글자 중에 잘 쓴 것은 오로지 대자 밑에 점 하나 뿐이로구나" 하고 평을 했다고 한다. 왕헌지(王獻之)는 크게 부끄러움을 느껴 더욱 서예에 매진하여 대성(大成) 했다는 일화가 내려오는 유명한 태비석(太碑石)이다. 왕희지 부인까지도 서예에 대단한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난정의 관광객들)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오늘날 절강성 "샤오싱" 즉 "소흥(紹興)"을 말한다. 계제사(契祭祀): 3월 삼짇날 물가로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액운을 막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말하며, 진(晉)시대에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연중 행사였다. 잠견지(蠶繭紙): 누에고치로 만든 종이로 지질이 좋기로 유명하며 매우 귀해 일반 서민은 구경도 어려웠다. 서수필(鼠須筆): 쥐 수염을 사용하여 만든 붓을 말한다. 작은 봇 한자루를 만들려면 큰 쥐 3백마리 이상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옛부터 붓 중에 최고의 붓으로 꼽히며 오늘날에도 서예가들이 갖고 싶어하는 꿈의 붓으로 불린다. 하연지(何延之): 당 현종 때 문인으로 그의 작품 "난정기蘭亭記"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왕희지의 글씨를 짐작할 수 있어 왕희지 필법 연구에 참고 문헌으로 활용하는 귀한 책이다.
(샤오싱 난정의 유상곡수 터) 지금도 술잔을 띄우고 詩를 지어 읊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고, 관광객을 상대로 시연회도 자주 열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샤오싱의 명소 중 한곳이다.
(경주의 포석정)
(중국 현대문학의 대부 루쉰(魯迅))
소흥(紹興)이 배출한 중국 근, 현대문학의 창을 연 소설가 "루쉰(魯迅)". 소흥은 현대 중국문학의 터전으로 불리며 자부심이 큰 문학의 도시이기도 하다. 8년에 걸친 일본 유학파로 동경의 독일협회학교에서 독일어를,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과 독일어를 공부했으나 거침없이 살다 간 인물이다.
(노신(魯迅)은 이런 가난하고 못 배우고 소외된 계급의 매듭진 내면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풀어낸 최초의 중국 작가 였다.)
들뜬 기분에 날뛰다가 폭도로 잡혀 혼자 총살 당한다는 내용)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편소설이다. 쑨원이 임시 총통에 취임하여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이듬해 1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한다.)
(유상곡수는 선녀로 분장한 아가씨들이 술잔을 띄워서 관광객에게 나눠주곤 한다.)
다시 왕희지의 글로 돌아가 난정서에 나오는 "회계(會稽)"는 소흥 근교의 명산(名山) 지역으로, 이상으로 난정서의 단어들과 소흥을 중심으로한 짧은 주석(註釋)에 가름코자 한다. --------------------------------------------------------------------------------------------------
(유상곡수 풍경)
蘭亭序(난정서) 序文(서문)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 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夫人之相與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 舍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得 曾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 係之矣 向之所欣仰之間 以爲陣迹 尤不能不以之興懷 況脩短 隨化 終期於盡 古人 云死生 亦大矣 豈不痛哉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爲妄作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悲夫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 끝 -
난정원(蘭亭遠)
천하의 왕희지 글이라지만 얼마나 그 필체가 수려했기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고 평하는 당 태종까지도, "난정서(蘭亭序)"에 그토록 애간장을 태웠는지 궁굼하지 않을 수 없다.
거위를 보며 필법(筆法)을 연구했다는 왕희지... 천하명필(天下名筆)이란 말도 부족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 서성(書聖)으로까지 추앙 받는 이유는, 남 모르는 엄청난 노력의 결정체는 아니었을까~?. 천 년 전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글이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정신적 지주로 남아서, 천하제일국보(天下第一國寶)로 추앙 받는 난정서(蘭亭序)를 이 시간 다시금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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