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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 묘

백산(百山) 2010. 11. 26. 14:03

 
풍수風水의 본질과 기본사상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세상 이치에 따라 우리는 오래전부터 풍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왔다. 동양에서 풍수란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둔 실천철학으로 만물을 생성시키는 자연의 기를 받아 복을 누릴 수 있다는 환경결정론적 사고방식과 관계가 깊다.

풍수는 글자 그대로 바람과 물을 뜻한다. 바람風을 막고, 물水을 얻는다는 의미로, 물은 생기가 있기 때문에 생기가 축적되면 복을 가져온다고 믿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세계관과, 땅과 공간의 해석을 체계화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 지리학설이 담겨 있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우주만물의 이치를 양중유음陽中有陰, 음중유양陰中有陽이라는 관점에서 보는‘음양상생陰陽相生의 원리’를 풍수에 적용하였다. 즉,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적 힘인 기가 산을 따라 흐르다가 특정 장소에 집중되면 혈을 이루게 되는데, 이곳에 국가의 도읍이나 개인의 주택 그리고 묘지를 정하면 땅 속
의 기를 받아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풍수사상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서울인 조선의 한양 천도도 결국 풍수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제왕의 꿈’을 품은 흥선대원군과 풍수의 인연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생기가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기 때문에 장풍藏風은 바람을 막는다는 뜻이 된다. 득수得水는 땅에 수水가 있으면 생기가 있고, 생기가 축적되면 지상에 복을 가져온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동양의 철학·지리학·건축학의 종합판이라고 볼 수 있다.
 
남원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묘는 흥선대원군이 제왕의 꿈을 품고 전국의 명산을 찾은 끝에 발견한 명당 중의 명당,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다.
 
풍수에서 중요한 것이 ‘명당’이다. 높고 낮은 산들이 사방을 에워싼 가운데 작은 하천이 모여 흘러나가는 장소로 땅의 근본적 힘인 기가 산을 따라 흐르다가 특정 장소에 집중되면 혈을 이루게 되는데, 이를 명당이라고 한다.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풍수공부를 하며 전국의 명산을 찾아 다녔으나 마음에 드는 명당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 당대의 풍수지관인 정만인이“충남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의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이대二代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것이며 앞으로 10여 년 안에 틀림없이 아드님이 제왕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실권을 잡기 위해서 1845년 아버지인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이구李球이며 16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명당인 덕산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정만인의 예상대로 남연군묘를 이장하고 난 7년 후 흥선대원군은 차남 명복命福(고종의 아명)을 얻었는데, 이 분이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제25대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남연군의 손자이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명복이 26대 왕으로 보위에 오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남연군묘의 이장 때 상여는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운구하였는데,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민이 동원되어 상여를 메었다. 현재 가장 마지막 도착 마을인 ‘남은들’에 보존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유물로 남아 있다.
 
천하의 풍수명당 남연군묘의 비밀
남연군묘의 이장 때 상여는 현재 가장 마지막 도착 마을인‘남은들’에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명당 중의 명당 남연군묘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자락에 있다. 석문봉(653m)을 중심으로 좌로는 가야산 정상인 가야봉677m)이, 우로는 옥양봉 (621m)이 병풍을 두른 듯 웅장한 자태를 확연히 뽐내고 있다. 풍수상 천을天乙, 태을太乙이 호위하고 있는 듯하다. 천을과 태을은 북극성 주변의 별로 천황대제를 뜻하는 천황대제성天皇大帝星을 좌우에서 보좌함을 의미한다.
또한 석문봉을 중심으로 가야봉, 옥양봉 등 3
개의 봉우리가 균형 잡힌 형태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큰 봉황의 머리와 양쪽 날개를 연 상시키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남연군묘의 주룡主龍인 주산主山의 줄기는 석문봉의 중심에서 좌선左旋으로 출맥出脈하여 수많은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면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억센 기氣를 정제하고 순화하며 내려와 크게 혈장穴場을 만들었다.
 
남연군묘 앞의 조망은 마치 만조백관이 조아리는 형상으로 아주 먼 곳까지 시원스레 틔어 있다. 풍수를 모르는 처음 가보는 사 람일지라도 절로 탄성이 나온다.
 
풍수에서는 혈을 품고 있는 일정범위를 ‘혈장穴場’이라 한다. 뚜렷한 용맥 위에 불룩 솟은 형태인데,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처럼 볼록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남연군묘는 석문봉에서 뻗은 여러 산줄기 중 가장 튼튼하고 힘찬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풍수지리에서 혈의 크기는 주룡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바로 힘찬 용맥이 천자지지의 명당이 된 것으로, 풍수를 모르는 처음 가보는 사람일지라도 절로 탄성이 나온다.

남연군묘 앞의 조망은 마치 만조백관이 조아리는 형상으로 아주 먼 곳까지 시원스레 틔어 있다. 청룡과 백호를 이루는 산줄기는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며 상가리 입구의 수구水口를 막아 가히 명당이라 할 만하다.

물론, 남연군묘의 풍수가 완벽할 수는 없다. 청룡 쪽이 혈과 많은 거리를 두고 감싸니 그 사이가 풍살이 염려되고, 청룡 줄기 하나는 묘를 향해 공격하는 듯 머리를 내밀고 있어 후에 풍수가들은 고종과 순종이 외세의 치열한 압력 속에 숱한 시련을 받다가 망국의 서러움을 당하였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남연군묘의 터는 원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의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는 자리였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전 재산을 처분한 대가인 2만 냥의 절반을 가야사 스님들에게 주고 강압적으로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가야사는 폐사廢寺되고 남연군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이어 정만인의 말대로 도굴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석회 300부대를 써서 묘를 단단하게 다진다. 이 예견 또한 훗날 도굴을 막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이 된 후에 가야사를 없앤 죄의식과 가야사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남연군묘 맞은편 서원산 기슭에 보덕사報德寺라는 사찰을 새로 지었으
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쇄국정책
독일의 상인인 오페르트(Oppert, Ernest Jacob)는 1868년 4월 21일 미국인 젠킨스의 재정적 지원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 지리를 잘 아는 프랑스 신부 페롱을 앞세워 조선인 2명, 백인 8명, 말레지아인 20명 외 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680톤급의 차이나호를 타고 오다가 1868년4월 18일 홍주목 신평현(현 당진군 신평면) 행담도行淡島(현재 서해안고속도로 행담휴게소 소재)에 정박했다. 그후 60톤급의 그레타호에 옮겨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예산군 덕산면 구만포에 상륙, 러시아 군사라 사칭하면서 남연군묘를 도굴하기 위
해 쳐들어왔다.

오페르트 도굴단 일행은 덕산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의 건물을 파괴하였으며,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온 덕산군수에게 발포를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덕산군수와 주민들은 그들의 도굴을 막기 위해 남연군묘로 갔지만 소총으로 무장한 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묘가 예상보다 견고하였기
때문에 도굴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시신과 부장품을 가지고 조선정부와 협상하려 했으나 무덤이 단단하여 도굴에 실패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하여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정부로부터 소환을 당하였으나 그들의 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나 증인이 없다는 이유로 재판은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은
채 종결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원군은 매우 분노하여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의미의‘척화비’를 세워 서양세력은 무조건 몰아내야 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이후 서양 오랑캐가 천주교도들과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모든 서구세력에 대해 적대적으로 바뀌는 ‘쇄국정책’으로 근대화가 늦어지는 불행을 초래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 당시나라를 지키려는 선조들의 애국심을 느끼게 된다.
 
현존하는 풍수의 최고 품질유산
현재 대한민국에는 풍수지리가 좋은 많은 명당과 유산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최고 풍수명당의 품질유산은‘남연군묘’이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당대 최고의 풍수지관인 정만인의 탁월한 풍수지식과 출중한 예견도 이를 뒷받침 한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흥선대원군의 풍수에 대한 믿음과 수백 리 떨어진 곳으로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과감하게 이장한 그의 결단력이 절절히 느껴지는 남원 군묘. 거기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를 왕으로 만들어낸 이대천자지지 二代天子之地가 된 것이다. 한국은 현재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텔링의 풍수품질유산을 갖고 있다. 품질의 진정한 뜻은 그 분야에서‘최고’아닐까. 명당 중의 명당, 최고 중의 최고 남연군묘를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품질이 무엇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국토 곳곳에 숨쉬고 있는 선조들의 자랑스런 품질DNA! 그것을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가 세계 모든 분야에서 최고 중의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절로 우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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