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山水亭 雜詠(산수정 잡영)
- 梅山 鄭 重器(1685~1757)
梅之谷西面皆山而一帶小溪水瀉 其間溪之西曲有一岡麓低垂陡斷
매지곡서면개산이일대소계수사 기간계지서곡유일강록저수두단
而爲層巖巖上茅簷肅然獨立負山 而臨水者山水亭也始余卜築於是
이위층암암상모첨숙연독입부산 이임수자산수정야시여복축어시
谷往來栖息者殆二十年矣庚申冬 乃移家尊居愛其水石林巒之勝擬
곡왕래서식자태이십년의경신동 내이가존거애기수석임만지승의
構小窩於山溪間以爲晩景休養之 所而家貧力屈久而未成辛未夏買
구소와어산계간이위만경휴양지 소이가빈역굴구이미성신미하매
人舊屋遂就第一層鑿崖築其而榮 之子姪添費董事書社僧相其役至
인구옥수취제일층착애축기이영 지자질첨비동사서사승상기역지
翌年秋工始訖亭凡三間中一間爲 堂左右兩夾爲室前附一架以廣堂
익년추공시흘정범삼간중일간위 당좌우양협위실전부일가이광당
之廡扁其堂曰山水亭右曰智及齋 左曰仁守齋盖取魯論二樂之訓總
지무편기당왈산수정우왈지급재 좌왈인수재합취노론이락지훈총
稱於堂分排於兩夾也亭後又結草 屋數間以居守者亭下第二層曰聽
칭어당분배어양협야정후우결초 옥수간이거수자정하제이층왈청
琴臺第三層曰詠歸臺亭之西有石 罅成坎細涓自湧者曰泄泉塞其下
금대제삼층왈영귀대정지서유석 하성감세연자용자왈설천새기하
種蓮爲沼者曰君子塘亭之北拓崖 側種竹成行者曰高賢社臺之南又
종연위소자왈군자당정지북척애 측종죽성행자왈고현사대지남우
有山麓回抱兩岸相對如門中有微 徑自溪緣磴而上可喚爲石門石門
유산녹회포양안상대여문중유미 경자계연등이상가환위석문석문
之間谷水落崖數丈爲飛瀑每急雨 至聲琮琤可聽中臺之上雜植花卉
지간곡수락애수장위비폭매급우 지성종쟁가청중대지상잡식화훼
幽香樷播下臺之傍老木環擁綠葉 成陰溪邊磐石平鋪二十餘步坦然
유향총파하대지방노목환옹녹엽 성음계변반석평포이십여보탄연
如廣庭水色山影交映於其間皆可 以上下盤旋而助山水之趣矣余素
여광정수색산영교영어기간개가 이상하반선이조산수지취의여소
有山水癖每遇雲嶺複疊烟水浩蕩 則未嘗不窈然而喜豁然而舒吟我
유산수벽매우운령복첩연수호탕 칙미상불요연이희활연이서음아
玩賞之不置而中罹疾病晩墮風塵 及夫役閒之後筋力又已衰矣無由
완상지불치이중이질병만타풍진 급부역한지후근력우이쇠의무유
扶藜杖理蠟屐以恣選勝之樂姑且 隱伏於孱岑細流之中隨分採釣謝
부려장리랍극이자선승지락고차 은복어잔잠세유지중수분채조사
絶世事日取古人書籍俯而讀仰而 思沈潛反復若有默會於中者夫然
절세사일취고인서적부이독앙이 사침잠반복약유묵회어중자부연
後始覺小溪山亦自有山水之理何 必窮名山歷大川如子長遊而後可
후시각소계산역자유산수지리하 필궁명산역대천여자장유이후가
哉於是乎依玆山傍玆水而爲之亭 居於斯寢於斯讀書養性於斯開囱
재어시호의자산방자수이위지정 거어사침어사독서양성어사개창
而山面入目矣倚檻而水聲在耳矣 觀乎山而求仁者之氣象玩乎水而
이산면입목의의함이수성재이의 관호산이구인자지기상완호수이
想智者之胸次于以託幽情而娪暮 景是則山水之樂不專在於山水而
상지자지흉차우이탁유정이오모 경시칙산수지락불전재어산수이
在於吾之心也雖然於水徒見其澄 澈而不究乎周流無滯之用則何以
재어오지심야수연어수도견기징 철이불구호주류무체지용칙하이
謂之樂水也於山徒仰其嵬卓而不 體夫厚重不遷之德則何以謂之樂
위지낙수야어산도앙기외탁이불 체부후중불천지덕칙하이위지낙
山也必須致力於格物之工貫通該 洽專意於居敬之方持守堅確然後
산야필수치력어격물지공관통해 흡전의어거경지방지수견확연후
可以窺仁智之體而語山水之理矣 如吾鹵識淺學老而無聞何敢與議
가이규인지지체이어산수지리의 여오로식천학노이무문하감여의
於仁智之妙而自幼少時徒父兄師 友之側得聞至訓竊有取感發而慕
어인지지묘이자유소시도부형사 우지측득문지훈절유취감발이모
尙之者矣及此衰朽之年血益耗神 益昏而猶不敢自棄自畵以貧平日
상지자의급차쇠후지년혈익모신 익혼이유불감자기자화이빈평일
誘掖之意方欲就此靜僻之地習經 傳會朋友冀或絲毫有資於益智輔
유액지의방욕취차정벽지지습경 전회붕우기혹사호유자어익지보
仁之力朱夫子取謂我斬仁智心偶 自愛山水者乃夫子自謙語而在愚
인지력주부자취위아참인지심우 자애산수자내부자자겸어이재우
蒙眞箇是着題矣玆賦小詩十二篇 記其事以自省水神山靈其肯許我
몽진개시착제의자부소시십이편 기기사이자성수신산령기긍허아
而佑我否時維壬申重陽後二日山水主人記
이우아부시유임신중양후이일산수주인기(1752년 9월 11일)
□ 산수정 잡영(山水亭 雜詠)
- 저자 : 조선후기 문신학자 梅山 鄭 重器(1685~1757)
- 번역 : 시인, 수필가 정 용하님.
매화 피는 고을 서쪽은 모두가 산이며 띠같은 실개천에는 물이 콸콸 흐른다.
그 사이 다시 서쪽 방향으로 굽은 시내가 있고
산기슭 저편에는 험준한 절벽이 드리워져 짐을 떠맡은 산은 여러 층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는 숙연히 홀로 우뚝한 풀 처마가 있다.
물과 인접한 이 곳이 山水亭(산수정)이다.
일찍이 내가 골짜기 가운데 살만한 땅을 골라 지은 집이다.
오고 가며 기거하고 휴식한지 대략 이십년 된다.
경신년(1740년) 겨울에 이사하여 절경인 물과 바위 그리고
숲과 산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살았다.
계곡 사이에 위치한 산에 대충 얽은 작은집을 지어 해질 무렵의 경치를 바라보는 휴양소이다.
집이 가난하고 가세가 기울어 오래토록 완성하지 못하였다가 신미년(1751년) 여름에
옛집(분가하기 전의 집)의 일손을 사서 벼랑을 깎고 바탕을 다져 마침내 제 1층을 이루었다.
자손들이 그 일에 기꺼이 함께 하여 비용을 보태고 일과 장부를 감독하여 다음해 가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자가 완성되었다.
무릇 세칸 중, 한 칸은 마루이고 좌우 양쪽은 방을 겸하였다.
빛나는 초옥 앞면 처마에 선반으로 된 편액을 부착하여 山水亭(산수정)이라 일컬었고,
우측 방을 智及齋(지혜에 도달하는 방), 좌측 방을 仁守齋(어짊을 지키는 방)라 하였다.
노나라 논어의 두 가지 즐거움(樂山樂水)의 가르침을 어찌 취하지 않으랴.
한마디로 말해 마루의 직분은 두 칼자루(仁즉 山과 智즉 水)를 소통하는데 있다.
거처에 응하고자 정자 뒤편에 여분의 초목으로 엮은 가옥 두세 칸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누각 아래 제 2층을 聽琴臺(거문고 소리를 듣는 누각)라 칭하고,
제 3층을 詠歸臺(시 읊음으로 돌아가는 누각)라고 불렀다.
정자 서편 바위틈에 저절로 물이 솟아나는 정교한 흐름의 웅덩이가 있으니
이를 泄泉(샘)이라 부르고 바위로 가려진 그 아래 연을 심은 못이 있으니
사람들은 이 곳을 君子塘(연못을 인격체로 봄)이라 칭했다.
정자 북쪽 절벽 가까운 곳을 확장시켜 대나무를 심어 무성하게 하니
사람들은 이 곳을 高賢社(덕망있는 현자가 모여있는 곳)라 불렀다.
정자의 남쪽 또한 산이 있고 기슭을 돌아들면
서로 대등한 문이 양편으로 돌계단에 둘러 쌓여 있는데 그 중간에 위치한 정교한 지름길에는
시초부터 텅 빈 인연의 돌다리가 있었으니 가히 石門이라 부른다.
석문 사이에는 계곡 물이 떨어지고 높이가 수 장(1丈은 10자)인 벼랑은 나는 듯이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인데 매양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 소리가 옥같이 맑고 또렷하여 가히 들을 만 하다.
또한 벼랑 위에는 온갖 화초가 자라고 있어 그윽한 향기가 널리 번져 나갔다.
벼랑 아래쪽 가까운 곳에 나이 먹은 나무가 있어 둥근 고리 모양의 옥으로 드리워진
푸른 잎이 개울가 그늘을 만들고 편평하게 펼쳐진 반석은 그 크기가 이십 여 步(보)가량
되는데 넓은 정원처럼 노출된 물의 색깔은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산 그림자와 교차하여
비춰지게 하니 사물의 상하가 쟁반 속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산수의 풍치를 도와준다.
산과 물이 있어 내가 질박해지고 잦은 질병이 첩첩으로 겹친 구름 산 고개와 만나니,
물 안개 드리워진 수면은 아득하고도 넓구나.
만약에 멀고 아득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체험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쁨이 활짝 트여 호젓하게 시를 읊으니 보고 즐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다.
질병이 걱정 가운데 있으니 세상의 어지러운 일을 뒤늦게 털어 버리는 것은
게으른 부역이 된다. 뒤로 미룬다면 근력 또한 이미 쇠퇴하고 말 것이다.
靑藜杖(청려장 : 지팡이)의 도움으로 까닭없이 방자하게 경치 좋은 곳을 선택하여
잠깐 즐기거나 높고 험준한 절벽에 은밀하게 엎드려 가늘게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발걸음이 될 것이다.
분수를 지키고 세상사를 사양하면서 낚시하고 날마다 옛 성인의 서적을 구부려 취하고,
우러러 읽어 생각이 침잠하는 것을 반복하라.
여러 사물 가운데 실상에 대하여 깨달음이 있다면 대저 연후에 이를 증명하여 드러내는 것은
작은 개울과 산이다. 다만 그것은 산수의 이치가 처음부터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명산이 다하고 큰 강이 세월 속에 없어지는 것은 현인과 어른을 떠나 보내는 것과
같으니 후에 이것은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산에는 수목이 무성하고 주변에 물이 풍부하여 정자에 기거하면서 잠시 휴식도 하고
독서하여 性(성품)을 함양하다가 창문을 열고 산의 표면에서 시선을 들여 보내기도 한다.
난간에 기대면 물소리가 귀 안에 있고, 산을 바라보며 仁者(인자)의 기상을 구하고
물을 희롱하다가 연이어 그윽한 정에 의탁하여 智者(지자)의 흉중을 사색하도다.
해질 무렵의 경치를 즐기니 이는 곧 산수의 즐거움이요.
산수에는 외곬이 없으니 그 곳에 내 마음이 있구나.
물이 비록 갇혀 있을지라도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맑고 또한 계산하지 않아 막힘 없이
두루 흐르니 베풂의 본보기이라 어찌 좋아한다고 일컫지 않으리오.
산은 험준하고 높아 모두가 우러르는데 무릇 움직이지 않으니 너그럽고 점잖으며 옮겨지지
않는 것이 또한 德(덕)의 모범이니 어찌 좋아한다고 일컫지 않으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데 있어 도달하여는 노력에는 필수적으로 삶을 정교하게 관통하여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의미"를 지녀야 한다.
경(경)의 근본은 인과 지의 실체를 엿봄으로써 후에 이를 굳건하고 확실하게 지녀서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논어가 바로 산수의 이치인 것이다.
우둔한 지식과 얕은 학문은 항상 나의 실상이라 유소년 시절부터 父兄(부형)과 師友(사우)
에게서 가르침을 훔쳐, 감정을 펼치고 仁(인)과 智(지)의 오묘함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어찌
듣지 못했으랴. 더구나 이를 우러르고 숭상하는 사람인지라 나이가 들어 노쇠하고 보니
의욕은 넘치나 영민함은 소모되고 희미함이 더해지니 이로 말미암아 감히 몸을 돋보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 욕심없이 나의 그림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을 이끌어 도와 주려는
것에 뜻을 두고 나아갔도다.
조용하고 외진 곳에서 경전을 익히고 간혹 벗을 만나기를 바라며 실털 같은 밑천으로
智(지)를 더하고 仁(인)을 보태는데 힘쓰며 주자와 공자에게 의탁했다.
인과 지가 마음의 단짝이 되는 것은 나에게 참신함을 일러준다.
근본적으로 산수를 사랑하는 것은 곧 공자의 겸손한 말씀 시초이라
어리석음을 진리로 계몽하니 여럿 중에 이것이 제목에 딱 들어맞는 알맹이로구나.
賦(부)는 풍성하고 詩(시)는 가난하니 열두 편으로 그 풍광을 기록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니
물은 신기하고 영험한지라 이를 옳게 여기고, 즐김에 나를 허락하며 글을 올려 본다.
날자를 맞추는 것은 거추장스러우니 임신(1752)년 중양(음력 9월 9일)후 2일에
산수정 주인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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